간단히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야 무승부 당시 DJP 연립정부인 것을 감안하면 새천년민주당과 자민련 합쳐서 132명 한나라당 133명 여야 모두 과반을 넘지 못한 선거이다. 그 결과 전반기 국회의장은 새천년민주당이 하고 후반기는 한나라당이 하였다고 한다. 이 선거가 아쉬운 게 DJP 연합이 서로 관계가 소홀했던 시기에 총선을 치뤘다는 점이다. 선거 공조가 잘 이뤄지지 않아 아쉽게 진 선거구가 꽤 많다. 선거 공조만 잘 되었다면 여대야소 정국이 되어 김대중 정부가 좀 더 힘을 낼 수 있었을텐데 아쉽다. 그래서인지 이 선거 끝나고 DJP 연합이 다시 관계가 복원되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평을 내려본다면 이 때부터 자민련은 서서히 몰락해간다. 이미 충북은 보수성향이 강해져 한나라당 지지가 우세해져 갔고 대전 충남..
제13대 대선은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지금 사람들은 전두환 노태우를 엮어서 비판하지만 난 나름 노태우 대통령 집권이 민주주의에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만약 전두환 다음에 김영삼 대통령이나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했다면 어떠했을까. 물론 나쁘지는 않았겠지만 전 정권이던 전두환 처벌이 쉬웠을까. 4.19혁명 이후 박정희가 나타나고 12.12사태 이후 전두환이 나타났던 것처럼 또 다른 군부세력이 나타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노태우가 집권하고 3당합당하면서 김영삼이 제대로 하나회 청산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태우 당선은 현대 한국사의 또 다른 슬픔이다. 아마 직선제 개헌을 통하여 야권의 두 거목은 이번에야말로 정권교체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김영삼은 PK에..
제14대 대선은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사실 누구나 예상 가능했던 선거였다. 3당 합당 이후 김영삼 후보가 여당 대통령 후보로 나오고 김대중 후보가 야당 후보로 나온 상황이었다. 3당 합당으로 정치 현실은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었고 김영삼이 승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다만 문제된 것은 TK에서 반김영삼 정서가 있었던 것. 이러한 점을 노리고 출마한 후보가 바로 정주영 현대회장이다. 정주영 후보 등장 이후 김영삼과 김대중의 지지율은 박빙이 되었다. TK에서 정주영 후보를 많이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초원복집 사건이 터진다. 초원복집 사건이란 부산에서 기관장들이 모여 우리가 남이가 한 사건이다. 대놓고 지역감정을 부추긴 사건이다. 이를 정주영 후보 측이 녹음하여 언론에 터트렸고 대중에게 널리 알려..
제15대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다.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세 가지 업적만 꼽아보면 1. 경제난 극복 (IMF 조기졸업) 2. 민주주의 발전 (첫 평화적인 정권교체) 3. 통일 기반 (첫 남북정상회담) 그 외에 업적으로는 노무현 대통령으로 안정적 정권 승계, 노벨 평화상 수상 등이 있다. 다시 봐도 어마어마한 업적이다. 수십년간 대통령 되려고 한 사람인만큼 제대로 준비된 대통령인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제15대 대선은 김대중 후보에게 너무나 천운이었다. 우선 김영삼 대통령 집권 말기 IMF가 터지면서 여당에 대한 국민 불신이 높았던 때이다. 그 결과 여당에서는 이회창과 이인제로 분열됐고, 오히려 야당은 단결될 수 있었다. 19대 대선과 비교해 본다면 박근혜..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이 탄생한 선거다. 많은 감정이 교차하는 대통령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재임시기에 많은 일이 있었다. 탄핵도 당하고 덕분에 원내과반의석도 얻는 등 다이나믹했다. 제16대 대선 또한 그러했다. 사실 대선 2년 전 여론조사 결과를 보니 압도적으로 이회창 지지율이 높고 그 다음이 이인제였다. 야당에서는 이회창이 일찍부터 대선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고 여당에서는 이인제가 대선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여당 지지자들은 이인제로 정권 교체가 가능할까 라는의문이 있었다. 실제 여론조사 결과를 봐도 이인제가 이긴다는 결과가 없었다. 그 때 등장한 것이 노무현 후보였다. 부산에서 바보처럼 낙방만 하는 그를 노사모가 알아봤고 그 다음에 광주에서 알아봤다. 광주 경선에서 승리한 이..
이 날 출구조사가 발표되고 뜬 문구는 '여당 승리'이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 1998년은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지 얼마 안 된 허니문 기간이다. 허니문 기간이란 집권 초기에 정부에게 우호적인 여론 기간을 말한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DJP 연합으로서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함께 하는 연립내각이었다. 따라서 충청도 쪽이 자민련 승리로 나오지만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연립내각이므로 여당 승리인 셈이다. 반대로 야당인 한나라당은 영남과 강원을 얻는데 만족해야만 했다.
2002년 월드컵 때 치뤄진 선거이다. 아무도 관심을 안 가진 선거이다. 최종 투표율은 48.8% 처음에는 노무현 바람으로 선거 우위를 가졌지만 선거 중후반 김홍걸 구속으로 동력이 떨어졌고 월드컵 열풍으로 인해 아예 내팽개쳐진 선거이다. 그나마 긍정적인 것은 민주노동당의 약진. 개인적으로 월드컵 때 축구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연평해전도 있었다는데 그것도 몰랐고 지방선거한 줄도 몰랐다. 모든 관심이 월드컵 하나에 꽂혔던 때이다. 덕분에 이 선거에서 이명박 서울시장이 탄생했고 다음 대선주자로서 발돋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선거에서는 월드컵 때문에 민주당이 졌지만 월드컵 때의 열정으로 다음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탄생하게 됐다. 개인적으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 월드컵이었기 때문이다.
수도권 광역단체장 민주당 후보들이 뭉쳤다. 사실 수도권은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각종 현안들을 공동 대응할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다. 서울시장 박원순 후보, 경기도지사 이재명 후보, 인천시장 박남춘 후보 세 후보가 공동으로 교통난, 미세먼지, 청년일자리 등 정책 공동추진에 나선 것이다. 수도권 세 곳 모두 동일 정당이 당선된 적은 2006년 제4회 지방선거 이후 없다. 최근에 여당 지지율이 매우 높아서 동시 당선 가능성이 높다. 수도권 상생 발전을 기대해 본다.